미카엘라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님 - 춘천교구 동명동 성당에서 퍼왔습니다

김영중 미카엘라 2015. 10. 6. 22:02

교구내의 신앙의 증인 -이광재 신부님편| 자유게시판

운로/지요셉 | 조회 24 |추천 0 | 2015.02.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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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춘천교구내의 근.현대의 신앙의 증인 선조들을 조명하여 기술코저 합니다.
오늘은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져 합니다.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님은 1909년 6월9일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냉골에서 농부인 아버지 이광현 가브리엘과 어머니 김 수산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 나셨다.
어린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생도 많이 하였지만 늘 부모님께 순명하며 지내셨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나 괴로운 일을 할 때도 "싫다" "못한다" 라는 불평 없이 열심이셨고 특히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기쁘게 지냈던 것은 바로 가족이 매일 묵주기도를 바쳤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신부님께서는 형과 함께 20리를 걸어 매일미사를 거르지 않고 참례하였다.

  당시 신학생 자격으로 이곳을 방문해 지도 하였던 노기남 신학생(후에 서울 대주교가 되심)은 어린 티모테오에게 깊은 감동을 받고 은연중에 티모테오를 장례의 사제감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노기남 신학생의 주선으로 이광재 티모테오는 용산신학교에 입학 하게 되었다. 신부님께서는 소학교를 다니지 않고 신학교에 진학 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학교생활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왜소한 외모로 생긴 `작은촌놈`이라는 별명은 항상 붙어 다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동급생들은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그의 피나는 열심과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함에 감화되어 그를 `8품신부`(사제품인 7품을 넘어서는 인품을 가졌기에 8품을 받았다고 여겨 붙여진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님의 별명)라고 부르게 되었다. 언제나 반듯한 태도로 주의 깊게 남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에서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방학생활 중에도 신학교의 생활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사제가 된 뒤에도 이 습관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1931년 11월 21일에 삭발례를 받았고 1936년 3월28일 사제가 되어서 풍수원 성당의 정규하 신부의 보좌로 임명되었다. 풍수원성당은 당시 12개 군 29개 공소를 관활 하였기 때문에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 몸을 아끼지 않고 주임신부를 도와 순회 사목을 열심히 하였다. 이 시기에 선배인 오기선 신부님과 함께 수도명 `안토니오` 라는 본명을 가지고 우리나라 최초로 재속 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하여 청빈, 겸손, 정결의 생활을 하게 되엇다.

  하루는 횡성 공근 근처에 사는 신자가 병자성사를 부탁했다. 워낙 늦은 시각이라 주임신부님께서는 날이 새면 다녀오라고 했으나 티모테오 신부님께서는 왕복 40리가 되는 길을 걸어서 병자성사를 주러 가셨다. 또 어느날,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소녀가 봉성체를 영하던 중에 피를 토하여 신부님의 옷을 버려놓게 되었다. 병이 옮겨질까봐 한 신자가 신부님의 옷을 잡아당기자 "누가 감히 정결의 띠를 만지는냐? 하시며 죽어가는 영혼에게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데 나 살겠다고 신부가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있는냐?" 하고 꾸짖셨다.

  1939년에 티모테오 신부님은 양양본당 주임신부로 부임 하셨다.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강원도 산골 마을을 누비며 신자들의 영혼을 돌보셨다. 신부님께서 가는 곳마다 기적과 치유의 손길이 그치지 않았고 나쁜 습관을 고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신자들이 많았다. 이렇듯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님은 `착한 목자는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신부님의 좌우명 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양떼의 구원에 바치신 분이셨다.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양양성당 주임이였던 신부님께서는 평신도들과 함께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가는 성직자, 수도자들을 도와 주셨다.
1950년 본격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여기저기서 신부님들이 잡히고 순교하신 소식을 듣자, 티모테오 신부님은 공산당의 눈을 피해 신자들을 돌보러 다녀셨다. 점점 상황이 위험해지는 것을 느낀 신자들이 신부님께 탈출을 권하자 "난 교우들 두고 못간다. 교우들이 다 가면 내가 그 뒤를 따라 가겠다. 나 마저 떠나고 나면 이곳의 신자들은 누가 돌보겠는기? 그 한 사람이 누구인가 나는 몰라도 우리 주님은 알고 계신다. 마지막 양 한 마리를 위해서라도 나는 북녘땅 신자들을 외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신자들은 더 이상 신부님을 설득할 수가 없어 혜어지면서 마지막으로 순교자의 노래를 불렸다. 그 노래를 들어며 티모테오 신부님은 비장한 각오를 하셨다. `그래야지, 순교자가 되어야지.` 신부님은 위험을 무릎쓰고 주로 밤 시간에 미사를 드리고, 낮 시간에는 이동을 하며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성사를 주셨다. 신부님께서는 단 한 사람의 신자만 있어도 사제는 마땅히 성사를 위해 양 떼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하느님의 특별하신 보호로 탄압 아래서도 사제로서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었다.

  1948년 6월 중순, 공산당은 38도선 이북 천주교 성직자들을 모두 검거하여 평안북도 강제수용소에 감금하였고, 원산성당을 몰수하여 종각 십자가를 파괴하고 성당 내부 제대를 처분하였다. 신부님들이 납치된 후에도 양양성당의 티모테오 신부님께서는 무명양복에 고무신을 신은 사복차림으로 이천 김 바오로 신부님과 번갈아 북한 일대의 목자 잃은 양들을 먹여 살리러 다니셨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 사백리 북쪽의 신자들로 부터 그들을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티모테오 신부님은 양양에 있는 신자들에게 마지막 강복을 주고 행복한 나날이 다가올 것이니 계속 살아있어라고 말씀하시고는 북쪽으로 떠나셨다. 그러나 공산당은 티모테오 신부님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형무소에 수감시켰다. 신부님은 감옥에서 사제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기도생활을 게을러지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불편한 감옥안에서도 이웃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셨다. 그 해 10월 8일 늦은 밤 원산의 방공호에서 인민군의 총에 맞은 후, 다음 날 10월 9일 새벽녘에 하느님의 품에 오르셨다.

  *방공호에서 살아남은 한준명 목사의 증언
  시체로 가득 찬 방공호 안에는 신음소리가 가득했어요. "물, 물, 아이고 목말라" "응, 내가 물떠다주지."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구원의 목소리는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님이였어요. "이 신부니, 이 신부님," 하고 누군가 신부님을 불렀지만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는지 "응,응, 내가 가서 구해 주지." 하는 소리만 되풀이 하셨어요. 티모테오 신부님은 최후 운명의 순간까지도 남아 있는 온 정신력을 모아, 주위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그에 대답을 하고 있으셨던 거에요. 신부님의 몸 역시 꼼짝없이 죽어가는 마당에 자기 자신의 일보다는 오직 남의 일만 생각하는 거룩한 희생 정신은 예수님의 사랑,
그것이었어요. -아멘-

찬미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