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4월21일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1회

김영중 미카엘라 2016. 3. 27. 17:53

4월21일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

Conrad of Parzham, religious, 

St. Conradus a Parzham

San Corrado Birndorfer da Parzham Religioso

St. Conrad of Parzham, OFM Cap. (AC)

St. Conrad’s Capuchin-Franciscan

1818.12.22 바바리아 지방의 빠르잠 Parzham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1894.4.21에 자연사하였다
1930년 비오6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비오 6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콘라도는 1818년 독일의 바바리아 주 바쏘 교구이 작은 촌 파르잠(Parzham)에서 소박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건한 모친은 교육을 받아 어려서부터 성덕에 출중해 그 당시는 아주 드물게도 7세에 첫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어렸을 때부터 벌써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누구도 그의 앞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자는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복되신 동정녀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로사리오를 바쳤다.


  그는 어려서 양친을 잃어 일찍부터 고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세상 재물에 휩쓸리는 일은 없이 소년 시절을 깨끗한 백합화같이 보냈다. 그것은 물론 그가 신심 생활에 열심했기 때문인데, 세속을 떠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답을 지키며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과 영적 교제를 해 온 덕분이다. 참으로 그는 기도를 극히 즐겨 노동으로 피곤해졌음에도 여전히 무릎을 끓고 밤을 새운 적도 여러번 있었다.

   

젊은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그는 하느님과 보다 깊은 일치를 위해 자신의 상속권을 포기하고 31세인  1851년 9월 17일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본받아 까푸친회에 평형제로서 입회하였다. 그리고  1852년에 엄숙한 서원 의식을 마친 후에는  유명한 "자비의 어머니 마리아" 성지인 알떼팅에 파견되었다.  

 
   여기서 성지를 찾아 오는 가난한 순례자들에게 봉사하는 짐꾼의 직책을 받았다

그는 성녀 안나 수도원의 문지기 직책을 맡아보게 되었다. 40년 동안 문지기 수사로서 봉사했는데, 순례자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몰려들었으므로, 애덕과 인내를 실천하며 사도적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그는 이 직책에 충실히 근무한 40여 년 동안,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대단히 힘든 때도 있었던 문지기를 조금도 불쾌한 안색을 보임이 없이 성심 성의껏 완수하며,  그 유명한 영지를 찾는 모든 방문객에게 온화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미소로서 접대하여 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특히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은혜를 받았고, 미래의 일을 알리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콘라도는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고요한 수도 생활을 보내며 기도와 고행으로써 숭고한 완덕에 도달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았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 줄때는 무슨 좋은 말씀이나 훈계를 권면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애덕은 자신의 양식을 절약해 궁핍한 자에게 베풀어 줄만큼 대단했다.
 

   특히 가난한 이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아이들 측에서도 그를 따르게 되어 그의 훈계를 잘 따랐고, 그도 그들을 만날때 마다 항상 마음을 터놓고 재미있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빵 같은 것을 나누어 주기 전에는 그들에게 기도를 바치도록 했다. 이는 아직 죄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의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풍부한 은총을 내려 주시기 때문인데,
 

   콘라도는 사실 그들의 기도에는 많은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몇년 후 그 아이들 중 몇명은 사제가 된 자도 있었는데 이는 오로지 콘라도의 착한 지도와 기도 덕분이라 하겠다.
 

   "우리는 기도해아 한다!" 이는 늘 콘라도가 했던 말씀이다. 그는 그 말과 같이 실지로 기도를 많이 했다. 새벽 3시만 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바치기 위해 성당으로 급히 갔다.  그리고 그가 기도에 몰두해 하느님과의 상통으로 말미암아 만사를 잊고 있을 때 그의 입에서 불꽃이 나오며 그의 몸에서 후광(後光)이 비치는 것을 본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수사 콘라도는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는 또한 수난하신 주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때로는 몇시간이나 십자가 앞에 무릎꿇고 있을 때도 있었다.  
 

수사 콘라도의 생애는 고요히 지나가, 마침내 하느님께서 1894년 4월 21일 이 충실한 종을 영원한 나라로 부르셨다.  때는 마침 토요일 저녁이었고 삼종소리가 읍내를 지나 은은히 먼 들로 사라지는 때였다.  그의 죽음을 전해서 들은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 돌아가셨다"고 하며 그의 죽음을 섭섭히 생각지 않은 이 없었다.


 

   살아 있었을 때 자선사업을 많이 행한 콘라도는 사후에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 고생하는 사람들은 그가 천국에 있으면서 계속 자기들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때로는 그의 묘지를 순례하고, 때로는 그의 전구를 구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풍부한 효험이 있는 것을 보고 콘라도에 대한 신뢰의 정은 점점 높아졌다. 그의 전구로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1930년 6월 15일 복자품에 오르고,

다시 1934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계기로 장엄한 예식의 거행중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더보기

http://baolo1025.blog.me/220337404172


성녀 안나 수도원 성당 : http://cafe.daum.net/FiatLove/mCUG/938?q=%BC%BA%B3%E0%BE%C8%B3%AA%20%BC%F6%B5%B5%BF%F8%20%BC%BA%B4%E7%20%C4%AB%C7%AA%C4%A3&r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