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2일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3회
6월22일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ST. THOMAS MORE Martire, Third Order Franciscan
토마스모어 하면 일단은 '유토피아'를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그가 성인이다. 게다가 재속프란치스칸이다.
1477년 2월7일 영국 런던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모어는 당시 최고 명문인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 법률가로서의 길을 걷는다. 한때 사제직에 관심을 갖기도 한 그는 일생동안 기도와 단식을 게을리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신앙 중심의 삶을 살았다. 그는 프란치스코 3회원이 되었다.
런던 시 전속 법률가가 된 그는 공정한 변론과 빈곤 계층을 위한 헌신적 노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1516년 당시 영국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악의 근원으로서 사유재산 폐지를 지적한 저서 ‘유토피아’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영국 재무 차관과 하원의장직을 역임한 모어는 1529년 영국 최고 대법관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재판정에서 그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그리스도교 문명의 법률적 세습 자산에 대한 마땅한 존중, 국가와 맺는 관계에서 교회가 누려야 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끝없이 강조했다. 법을 통해 정의와 복음 정신이 살아 숨쉬는 국가를 만들려 한 것이다.
양심 지키다 처형 당해
그에게 큰 시련이 닥친다. 영국 왕이 스스로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한 것. 결국 모어는 1531년 영국 왕을 영국 교회 수장으로 인정하는 수장령 선서를 거부하고 대법관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533년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케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을 왕비로 책봉한다. 모어는 당연히 이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헨리 8세는 분노했고, 1534년 4월17일 왕의 권위를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모어를 런던 탑에 감금했다.
양심을 더럽히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그의 강직함을 꺾기 위해 국왕은 온갖 심리적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모어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에게 강요된 선서를 일관되게 거부했다. 수장령 선서는 전제 정치의 길을 여는 정치적, 교회적 타협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1535년 반역죄 죄목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시 모어의 죽음은 유럽인들에게 충격이었다. 에라스무스가 그의 죽음을 두고 “그는 영혼이 눈보다 깨끗하고 결코 과거나 미래에서나 영국이 다시 가질 수 없는 천재였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1935년 성인 품에
교회는 그를 1935년 성인 품에 올린다. 그리고 2000년에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며 “변함없는 도덕적 고결함, 영민한 정신, 개방적이고 재치 있는 성격, 출중한 학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던 그는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하는 사람들의 해악을 막고 정의를 증진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신도로 살며 그리스도교 복음 정신의 현실화를 위해 노력한 토마스 모어를 ‘교회 속 그리스도인’이 아닌 ‘역사 속 그리스도인’으로 본 것이다.
그 역사 속 그리스도인이 쓴 편지 한 통이 가슴을 아련하게 한다. 모어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 1534년 어느 날, 런던 탑 감옥에서 자신의 딸 마르가리따에게 편지를 쓴다.
[가톨릭신문, 2006년 10월 22일, 우광호 기자]
당대 유럽 사회를 비판한 제1권과 이상적인 사회인 유토피아를 묘사한 제2권으로 되어 있다. 당시 유럽 군주들은 자신의 재산이나 영토를 늘리는 데에만 전념하는 한편, 민중은 '인클로저'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심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국가나 법률도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한 '부자들의 공모'에 의한 사물화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유토피아에서는 시민을 평등하게 대하고, 화폐도 없으며, 공유재산제가 베풀어진다.
이 작품은 유쾌한 이야기 형식을 빌어 당시의 부패한 그리스도교 사회의 개혁과 재생을 정치가·지식인에게 호소하고, 참된 공공성·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뒤 유토피아는 일반적으로 '이상향'의 대명사가 되었고, 유토피아 문학의 장르를 창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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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for the Family Portrait of Sir Thomas More-HOLBEIN, Hans the Younger
c. 1527. Pen and brush in black on top of chalk sketch, 38,9 x 52,4 cm
Kupferstichkabinett, Öffentliche Kunstsammlung, Basle
인간은 보통 선뜻 눈에 띄는 공훈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앞에는 초자연적 성덕만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자연과 초자연적인 것을 다 겸한 공적을 남긴 사람도 있으니, 그런 이는 물론 세인의 갈채와 아울러 하느님으로부터의 상급도 받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말하려는 성 토마스 모어가 바로 이 같은 분이다.
그는 1480년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강직한 성격으로 지방민의 신망이 두터운 판사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토마스는 엄격한 아버지 슬하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그 당시 재산의 중직에 있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요한 머턴 추기경의 슬하에서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그의 성품은 곧 추기경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당시 문학을 한다는 이들은 연약하고 게을러 자연 타락의 구렁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런 환경에 휩쓸릴 겨를도 없이 오직 면학에만 열중했다. 이는 엄격한 아버지가 가끔 보내주는 약소한 학비로 그런 방면에 여유를 갖지 못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그의 유년 시절부터 마음속에 굳게 간직한 신앙과 열렬한 기도 생활의 힘이 더욱 컸던 것이다. 그는 다윗 성왕의 시편에서 마음에 맞는 구절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스스로 기도문을 만들어 조석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그의 학교 성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수(秀)였다. 특히 그는 라틴어에 능숙하여 어려운 문구를 자유자재로 구사(驅使)하며 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렵다는 시인 루싱아의 소설 중의 회화 편을 손쉽게 영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의 입신 출세만을 바라던 아버지는 그를 더 이상 그곳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런던에 돌아와 법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의 공명정대한 사건처리 솜씨는 귿 그 지방민들의 깊은 신망을 받게 되어, 불과 25세라는 약관으로 민의원에 당선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민의원이 된 그는 개인의 이익보다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된다는 결심아래 그야말로 분골쇄신하여 활약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추가 예산안 작성시에 10만 파운드의 예산액을 3만 파운드로 삭감하려는 논쟁을 벌여 그 결과 불행히도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일단 의원직을 사퇴했으나, 정의를 위해 싸운 그의 공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한편 그가 법률을 더 깊이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뒤 4년 동안 가끔 가까운 수도원을 찾아 수사들과 같이 고해의 생활을 하는 것을 배웠고 그것으로써 일신상의 덕을 닦았다.
그동안 그는 수사나 혹 사제가 되려는 생각으로 이를 지도 신부에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승낙을 받지 못하고 다만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2년간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유학했다. 거기서 돌아온 그는 다시 변호사업을 시작하고 경건하 요안나 골드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모진 바람은 다시 불어왔다. 즉 요안나는 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자녀의 양육을 위해 토마스는 다시 과부인 알리스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마스의 가정은 신심생활의 거울이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모든 면에 잇어 모범이 되어 매일 미사에 참여함은 물론, 식사때에도 성서 구절을 낭독하고 처자와 더불어 성서에 대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다른 이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말할 것도 없었고 손님을 대접할 때도 얼마나 정성껏 친절을 베풀었던지, 사방에서 찾아든 손님들로 집안이 들끓었으며, 그 중에는 외국손님도 많이 끼어있었다고 한다. 첼시에 별장을 둔 후부터는 더욱 많은 손님을 대접했다.
그러는 동안 토마스의 명성이 날로 높아가 마침내 대심원장이라는 중직에 오르게 되었다. 국왕 헨리 8세는 그를 신임하여 그에게 프랑스와의 화친 문제등 기타 여러가지 중책을 맡겼으며, 그때마다 그는 대 성공리에 책임을 완수 했다. 그러자 국왕은 그를 더욱 더 믿게 되어 1529년 10월에는 그를 재상직에 올려 주었다.
본래 겸허한 토마스는 그 같은 고위 영직을 탐하지 않았으나 국왕의 명이므로 그를 받들어 그 선정에 적극 조력했다.
다음은 그가 대심원장 때의 일화 한 토막이다. 그는 중대한 사건의 결심판결에 앞서 일개 판사에 불과한 노부(老父)앞에 꿇어 올바른 판결을 위한 축복을 빌었다 하니, 그가 얼마나 책임감에 충실했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같이 국왕의 총애를 받은 토마스는 신(臣)과 민(民)으로서의 모든 영예를 다 지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는 결코 국왕의 비도(非道)에 대하여 묵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즉 헨리 8세가 안나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황후와 이혼하고자 모어에게 동의를 청한 때이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헨리 8세의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의 영국 성공회가 시작된 것이지만, 가톨릭적 결혼관은 "주님께서 맺어주신 바를 사라미 능히 이를 풀지 못하느니라"하신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국왕에게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권유하려 했으나 국왕이 도저히 이를 들어주지 않았기때문에 마침내 사표를 내게 되었다. 물론 왕은 이를 수리하지 않았다. 토마스의 고민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정적들은 때를 이용하여 여러 자기 모략으로 토마스에게 역적의 죄목을 씌웠다. 토마스의 충성은 세인이 다 알기 때문에, 그런 죄목에 대한 혐의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다만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일보도 양보치 않을 것은 분명했던 것이다.
이것이 국왕의 비위에 거슬리게 되어 그는 즉시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재산까지도 몰수당했다. 그는 최후 판결을 받는 날 눈물겨운 심정으로 고해 영성체하고 미사 참여를 마친 후 일단 신자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고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몸이 되고 말았다.
재감 1년간, 정적들은 수차에 걸쳐 그의 배교와 번의 (飜意)를 꾀했다. 심지어는 그의 사랑하는 딸 마르가리타를 보내 "피셔 주교님도 국왕의 이혼을 승낙하셨는데 아버지도 마음을 돌리세요"라고 말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는 없다"하며 끝까지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은 사랑하는 아내 알리스가 와서 애걸했다. 남편이 없는 가정이란 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눈물로써 토마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알리스, 내가 양심을 어겨서 국왕의 비행에 동의하고 형벌을 면한다 합시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동안 더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있겠소?"
"한 20년쯤은.."
"뭐 20년쯤? 그래 그것 더 살려고 죽어서 영원한 지옥 불을 당해도 좋단 말이오? 그건 너무나 미련한 짓일 뿐이오" 하는 대답뿐이었다. 토마스의 옥중 생활을 편지를 쓰거나 저서를 저술하는 것 등이었다. "신앙을 위한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등은 재감 중에 저술한 서적이다. 얼마 후 그는 펜과 잉크까지도 압수당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기도를 드리는 것 외에는 위로를 삼을 길이 없게 되었고, 가끔 종이 조각에다 숯 부스러기로 편지를 써서 처자에게 소식을 전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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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년 7월 1일에 토마스에게 추상같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 집행은 6일이었다. 그가 단두대에 섰을 때,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무수한 군중들에게 전래대로 고별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인심을 소란케 한다는 이유로 금지 당하고 말았다. "나는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는다"는 간단한 한 마디와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소서"를 외쳤다.
변천 무상함은 세상의 상사인지라, 한때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대 재상이 지금은 역적의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려는 찰나에 아무리 심장이 강철같은 집행인일지라도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 토마스는 침착한 발걸음으로 그들 앞으로 가까이 가서 등을 두드리며 "걱정할 것 없어. 지금은 당신들이 나의 가장 고마운 친구들이야"하며 오히려 격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깐동안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스스로 단두대에 머리를 눕혀 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머리는 가장 번화한 거리인 런던 다리 위에 매달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했다 한다.
그러나 정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권력에도 굽힐 줄 모르는 철석같은 신앙은 마침내 상급을 받았으니, 즉 1934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토마스는 요한 피셔와 더불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근대적인 성인으로 전세계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Sir Thomas Moore is played by Jeremy North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