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성인

7월10일 성녀 베로니카 율리아니 동정

김영중 미카엘라 2016. 7. 1. 08:56

7월10일 성녀 베로니카 율리아니 동정

St. Veronica Giuliani, OFM Cap. Abbess (RM)Veronica Giuliani, virgin, II Order -- Mem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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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우르비노(Urbino)의 메르카텔로(Mercatello) 출신인 성녀 베로니카 지울리아니는 우르술라(Ursul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어릴 때부터 신심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수도생활을 꿈꾸었다. 그래서 결혼하라는 부친의 권유를 끝까지 물리치고 1677년에 치타디카스텔로(Citta di Castello)의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베로니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기 시작하여 1697년에 오상을 받았다. 치타디카스텔로의 주교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녀의 오상은 진실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녀는 관상생활과 활동을 잘 조화시켰고 34년 동안이나 수련장직을 맡았으며, 1716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책임을 다 하였다. 성녀 베로니카는 여러 가지 초자연적 은혜를 받은 18세기의 위대한 신비가로 유명하다. 그녀는 1804년 복자품에 올랐고,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  가톨릭 홈 -




매우 실리적인 신비가,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Veronica Giuliani, 1660-1727)

 

얼마나 엄청나게 긴 일기를 썼는지! 

베로니카 쥴리아니(Giuliani)는 몸에 예수님의 오상 성흔을 받은 신비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실천적인 여인이었고 동시에 저술 활동이 정말 뛰어난 일기 작가였다. 220,000장에 달하는 그녀의 ‘일기’를 보면 그녀 자신의 관상생활과 신비신학에 대한 출중한 통찰력이 잘 드러난다. 이 때문에 그녀가 교회 학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기에서 그녀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의 극적이고도 결렬한 체험을 직접적으로 알려준다. 그녀가 표명한 바, 그 글들은 '단순한 순종을 위하여 고행과 쑥스러움으로' 쓴 것이라는데, 실제로 수면 부족을 불사하고 밤이 깊도록 공들여 기나긴 글을 써 나갔다고 한다. 그 일기는 (초기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한) 5개의 특정 소책자로 이루어져 있고, 1727년 3월 5일까지 이어져 있으며, 67년간의 성녀의 생애를 묘사하고 있다. 그녀에 의하면 그 날에 성모님께서 “마침표를 (찍을) 때다!”라고 일러주셨고, 그제서야 성녀는 펜을 영영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신앙생활이 독실한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우르술라 

베로니카 성녀는 1660년 12월 27일, 메르카텔로 술 메타우로(Mercatello sul Metauro)에서 태어났고, 그 다음 날 ‘우르술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쥴리아니’는 그 고장의 주둔군을 지휘하는 소위였다. 베로니카의 어머니 ‘베네딕타 만치니(Mancini)’는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들 중 두 명은 유아 때 사망했다. 쥴리아니 집안은 매일의 공동기도와 화합과 선행 실천으로 인한 독실한 신앙생활이 잘 드러난 가족이었다. 베로니카의 시성 운동 때, 한 증인은 ‘쥴리아니 집안에서, 그들은 성인의 전기를 매일 저녁에 낭독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어릴 적 놀이친구는 아기 예수님이었다 

막내였던 우르술라는 네 명의 언니와 함께 신심이 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어릴 때부터 우르술라는 성화들 속의 아기 예수님과 대화하곤 했다. “사랑하는 예수님, 저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며 당신께서는 제 것입니다.” 하고 말하자 아기 예수님께서는 “너는 온전히 나의 것이며 나는 네 것이다.”라고 대답하시곤 했다. 한 번은 아기 우르술라가 정원에서 꽃을 모을 때에 아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나는 너의 참된 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사라지셨다. 우르술라는 아기 예수님을 찾으려고 집과 마당을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1667년 4월 28일, 매우 경건하고 섬세하며 다정했던 우르술라의 어머니가 4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남으로서 우르술라는 고아가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임종 직전 딸들을 불러 십자고상을 가리키며 예수님의 오상에 각각 딸들을 맡겨드렸다. 우르술라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에 맡겨졌다. 그 후, 아버지가 파르마 공작의 세무 관리사로 고용되어 ‘피아첸자(Piacenza)’로 이사 다녀야 했을 때에도 딸들은 아버지를 따라 여전히 모범적인 그리스도교 생활을 했다. 훗날에 베로니카는 이 시절의 행복을 장난 가득한 어린 시절, 착한 주변 사람들과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심으로 가득찬 시절로 그려냈다. 그리고 초창기 수도생활에 대한 매력과 수도성소에 대한 아버지의 짜증스럽고 끈질긴 반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준다.

아버지의 맹렬한 반대를 극복하고 카푸친 글라라회에 입회하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쥴리아니는 네 명의 큰 딸들에게는 수도원 입회를 기꺼이 동의했지만,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겼던 막내딸 우르술라의 입회는 절대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영특한 우르술라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결혼시킨 뒤 늘 자신 곁에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르술라는 9살 때 벌써 카푸친 글라라회 수녀가 되기로 결정한 상태였고, 마음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딸의 확고한 의지에 결국 아버지는 한 발 물러서야 했고, 1677년 10월 28일, 17살이 채 되지 않은 우르술라는 ‘치타 디 카스텔로(Città di Castello)’의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에서 수녀복을 입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르슬라는 ‘베로니카’라는 의미심장한 수도명을 받게 되는데,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참된 형상(vera icona)’이라는 뜻이다. 카푸친 글라라회 수련자가 된 베로니카 자매는 처음부터 망설임 없이 열정을 다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님의 충실한 모방이 되기로 결심했다.

수도원의 ‘막내둥이’ 

수도원에서 가장 어렸던 베로니카 자매는 ‘아기’ 또는 ‘막내둥이’를 뜻하는 ‘la Bambina(라 밤비나)’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는데, 별명답게 늘 생기 넘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입회 할 때부터 그녀는 특유의 천진함과 습관으로 다져진 기도생활, 한없는 열정과 진지함으로 다져져 있었는데 그로 인해 영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상태였다. 어릴 때부터 접해 온 성인들의 모범을 자신의 생활 전형으로 삼았고, 그 어떤 장애가 와도 수도생활의 완덕에 이르려는 결정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베로니카 자매는 애초부터 영웅다운 거룩함에 이르기로 결심했고, 성인들이 앞서 걸어간 길을 (성인들의 훈련소가 되었던 이 수도원에서) 관상기도와 고행과 보속으로 굳건히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수도생활을 한 지 2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그녀는 성공할 초심을 잊지 않았고, 어떠한 난관이나 오해에도 굴하지 않았다. 수도원의 삶이란 단조로운 일상의 연속이지만, 베로니카 자매는 하느님께 이르는 그녀만의 독특한 길로 부지런히 발을 디뎌 나갔고, 놀랍고도 특별한 여러 이정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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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신비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따른 이정표들 

1678년 11월 1일 종신서약을 하고, 1681년 4월 4일에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녀의 머리에 당신 가시관을 씌워 주셨다. 1688년부터 1691년까지는 수련장의 의무를 수행했고, 1693년 12월 12일부터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694년부터 1698년까지 수련장의 의무를 다시 한 번 수행했고, 성 금요일이었던 1697년 4월 5일에는 오상 성흔을 받았다. (오상에 당황한 베로니카는 주님께 간청기도를 올렸고, 손과 발에서는 출혈이 멈추었다. 그때가 1700년이었다. 하지만 옆구리에서는 피가 주기적으로 죽을 때까지 흘러 내렸다.) 그녀는 1697년에 교황청 검사성성(현 신앙교리성)의 재판에서 고소를 당했고, 그로 인해 2년 후 투표권과 당선권을 박탈당했다. 

이 날짜들과 사건들은 베로니카 자매의 신비스러운 내면생활의 흐름을 잘 암시해주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그 신비한 현상들에 대해 그녀의 많은 동료 수녀들은 수도자다운 신뢰심과 감탄으로 반응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또 다른 수녀들의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베로니카는 결국 자신의 ‘가여운 인간성’을 폐를 끼쳤을 온갖 궁핍과 굴욕과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가 남으로부터 받아야 했던 고통들과 자기 스스로 가했던 그 고통들은 상당히 가혹한 것이었다. 사실 현대인들은 이러한 행동에 대해 잘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도한 극기의 단계를 넘어선 후에야 비로소 베로니카 자매 자기 자신도 그 극심한 행동을 ‘사랑이 나로 하여금 하게 했던 그 미친 짓들’로 비난하게 되었다. 1697년 오상을 받았을 때부터 이 ‘미친 짓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1699년에는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서야 그녀는 ‘자기 자신을 더욱 더 정화시키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신 일, 그것을 몸소 목격하고 알게 되었던 그 고통과 고뇌’에 만족하게 되었다.
 
현명한 수련장 

베로니카 자매는 이 교훈을 젊은 후배 자매들에게 반드시 물려주고픈 황금률 원칙으로 삼았는데, 그 이유는 ‘보속 행위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수련자들을 지도하는 34년 동안 베로니카 자매는 수련자들에게 신비 영성에 관한 책을 읽지 못하게 했는데, 이것은 신비주의에 대한 베로니카의 조심성과 현명함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몫 

베로니카 자매의 천성은 마르타의 몫보다는 마리아의 몫에 더 부합하는 편이었다. (루카 10: 38-42 참조) 수도원에서의 첫 몇 년 동안에는 관상과 묵상에 몰두함으로써 완덕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켰다. 사소한 손일이나 변변치 못한 봉사들에 대한 거부감 또한 그녀의 그러한 경향에 더욱 이바지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손일은 일종의 극기였고, 때문에 극도의 거부감을 일으켰다. 그것은 관상하고 고행하는 일보다 더 유익하고 이타적인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1690년 후반에는 생각이 바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 자매는 관상이 인생의 핵심적 윤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주 의문을 품었으며, 급기야는 관상생활과 활동생활 중에 어느 쪽이 영적으로 더 나은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선행을 하기 위해서 너는 세속에 머무를 수도 있었고 그리했으면 다른 이들에게 더 유익할 수도 있었다.”라고 말 한 적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수도원에 머무르면서도 더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결론에도 이르게 되었는데, 하느님 안에 숨은 생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일은 기도로써, 또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써 어디서든 이루어져야 합니다. 독방으로 물러남으로써가 아니라 공동체 한 가운데에 있음으로써 내가 예수님과 은둔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 하느님께서 나에게서 요구하고 계신 일은 활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 같습니다.” 베로니카 자매는 하느님을 찾고 흠숭하는 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 101가지 관심사들 중에서 그분을 진심으로 찾아뵙는 실제적인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도 죽을 때까지 그 실제적인 경험 법칙을 따랐고, 동료 자매들에게도 확신 있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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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시설을 확장시켰던 원장수녀님 

1716년 3월 7일, 감사성성은 베로니카 자매에게 취했던 징계 조치를 취소했다. 베로니카 자매는 당선권과 투표권을 다시 가지게 되었고 수도원 내의 선거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몇 주 후에 자매들은 베로니카 자매를 수도원장으로 선출했고, 그녀는 ‘어머니 아빠티사’가 되었다. 베로니카 어머니는 죽었을 때까지 이 의무를 이행했다. ‘아빠티사’로 지낸 14년간의 기간은 하느님의 복을 가득 받은 해였고, 기적의 빛들로 휩싸였던 때였다. 순교자적인 사랑의 고통(옆구리 성흔)으로 매우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낸 거룩한 신비가이면서도 매우 현실적이었던 성녀인 베로니카 자매는 이 시기에 좁은 수도원을 확장시키고 상당히 번거로운 상수도 시설을 개선시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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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신 분께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다! 

1727년 6월 6일, 그 고통은 더욱 격심해졌다. 30일 동안 베로니카 자매는 몸과 마음과 영의 세단계의 연옥을 통과해야 했다. 시성자료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그 때에 그녀는 수련자들과 젊은 자매들을 병상으로 불러 말했다. "나는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사랑이신 분께서는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내 고통의 원인이십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알려주세요!" 그런 다음 말씀의 육화를 찬미하는 성가를 들려주라고 부탁했다. 노래를 듣는 동안 성녀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여러분들 중에 이 사랑에 울지 않을 사람은 누구신가요?”라며 외쳤다. 1727년 7월 9일 새벽, 치타 디 카스텔라의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 아빠티사인 베로니카 쥴리아니 어머니는 고해사제에게 마지막 순종을 보인 뒤, 고요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 어머니에 그 딸! 

5개월 후, 성덕에 대한 베로니카 자매의 명성 때문에 교구장이었던 ‘알렉산델 피란치스코 코데보(Codebò)’ 주교는 교구 내 시성운동을 착수했다. 그리하여 1804년에 시복식이 거행되었고, 35년 후 1839년 5월 25일, 그레고리오 1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치타 디 카스텔로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는 성녀 베로니카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은 채로 보존되어 있다. 놀랍게도 성녀 베로니카의 직계 후계자 아빠티사였던 플로리다 ‘체르볼리(Cervoli)’ 자매도 영웅적으로 거룩한 생활로 인해 시성을 기다리는 복녀가 되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모전여전(母傳女傳)인 샘이다. 

“저의 하느님, 죄인들의 구원 외에는 당신께 청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이다. 그 모든 죄인들을, 그들을 모두 다 당신께 되돌아가게 하소서. 당신과 죄인들 사이에 중제자로 저를 세워주소서. 온갖 고뇌가 와도 될 것이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을 것이니이다. 사랑이신 분께서는 극복하셨고, 사랑이신 분 당신 자신께서 극복되어 계시나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그분께서 자체 안에 계심을 형언할 수 없는 양식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 성녀 베로니카 줄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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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카푸친작은형제회 홈페이지]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에 대한 베네딕토 16세의 교리 
(Pope Benedict XVI's Cathchesis on Saint Veronica Giuliani) 
로마 - 2010년 12월 15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중세 사람이 아닌 신비가를 한 사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바로 카푸친 글라라회의 승녀,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Giuliani)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12월 27일이 그 성인의 탄생 350주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가장 오래 동안 거주하셨고 선종하셨던 곳인 ‘치타 디 카스텔로(Citta di Castello)’와 그녀의 출생지인 ‘메르카델로(Mercatello)’와 ‘우르비노(Urbino)’의 교구는 이 행사를 기쁘게 경축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로니카는 1660년 12월 27일, ‘메타우로(Metauro)’ 계곡에 위치한 ‘메르카텔로’에서 ‘프란체스코 쥴리아니(Francesco Giuliani)’와 ‘베네데타 만치니(Benedetta Mancini)’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녀는 7자매 중에 막내딸이었는데 베로니카 외에도 이들 중 3명은 수도승의 생활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녀에게 ‘오르솔라(Orsola, 즉 우르술라)’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녀가 만 7세였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파르마(Parma)’의 공국의 세관 감독으로 ‘피아첸자(Piacenza)’로 이동되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우르술라는 자기 생활을 그리스도께 봉헌하고픈 갈망이 자신 안에서 점차 늘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부르심은 그녀를 늘 더욱 더 재촉했고, 만 17세가 되자 그녀는 ‘치타 디 카스텔로’에 있는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의 엄격한 봉쇄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평생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참된 형상(vera icona)’이란 뜻인 ‘베로니카(Veronica)’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사실상 이 성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참된 형상이 되었습니다. 

1년 후, 베로니카는 성대 수도서약을 하였습니다. 많은 보속과 커다란 고통, 가시관 씀과 신비적 혼인, ‘심상(心傷)’과 오상과 같은 예수님의 수난에 관련된 신비적 체험들을 통하여 베로니카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은 시작되었습니다. 

1716년, 만 56세 때에 그녀는 수녀원의 ‘아빠티사(Abbatissa - 원장수녀)’가 되었는데, 1727년의 선종 때까지 그 직무에 있어서 거듭 추인되셨습니다. 선종 이전 33일 동안, 성녀는 매우 고통스러운 괴로움을 겪어야 했지만, 그것은 결국 심오한 기쁨이 되어 임종 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사랑이신 분께서는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내 고통의 원인이십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알려주세요!”(Summarium Beatificationis, 115-120) 

7월 9일,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서 성녀는 지상의 주거지를 떠났습니다. 만 67세였습니다. 그녀는 인생의 67년 중에서 50년이나 ‘치타 디 카스텔로’의 수도원에서 보냈습니다. 1839년 5월 26일, 그녀는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베로니카 쥴리아니는 편지, 자서전의 기록, 시 등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성녀의 사상을 재건하는 주된 자료는 1693년에 시작했던 ‘일기’라는 작품입니다. 손으로 쓴 22,000쪽에 달하는 이 글에는 봉쇄구역 속 39년간의 생활이 담겨져 있습니다. 

글은 자연스럽게 막힘없이 이어져 흐릅니다. 글 위에 줄을 긋는 것이나 수정된 글은 아무것도 없고, 구두점들도 없으며, 예정된 계획에 따른 어떠한 장이나 부의 나뉨도 없습니다. 베로니카는 문학 작품을 쓰기를 의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안토니오 에우스타키(Antonio Eustachi)의 교구장 주교의 동의를 얻은, ‘오라토리오회(Filippini)’의 수도자인 지롤라모 바스티아넬리(Girolamo Bastianelli) 신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자신의 체험을 서면화 할 의무였던 것입니다. 

성녀 베로니카는 두드러지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이자 ‘신부(新婦)’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로니카는 언제나 몰두되어 열렬한 사랑으로 보답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충실하시고 진정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성녀는 모든 것을 ‘사랑의 열쇠’로 해석했는데, 이것은 그녀를 깊은 평정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또 그분께 피조물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보여드릴 수 있는 그 기쁨으로, 그리스도와 일치 된 채로 그 모든 것을 살았습니다. 

베로니카와 일치되어 계셨던 그 그리스도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고통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성부께 몸을 바치고 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기도와 봉헌의 두 갈래의 유형 안에서, 교회에 대한 그녀의 열정적이고 고통 받는 사랑도 바로 이 체험으로부터 우러러 나왔던 것입니다. 성녀는 이 관점에서 살았습니다. 즉 당신 자신 모두를 내어주신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기도하고 고통 받으며 ‘거룩한 가난’을 무소유나 자기 상실로서 추구한 것입니다. (cf. ibid., III, 523) 

저서의 매 페이지에서 베로니카는 온갖 고통 안에서 스스로를 봉헌함으로써, 자신의 중재기도들을 강화하여 누군가를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온 세상’의 구원에 대한 갈망을 느끼며 살아가면서, 모든 ‘거룩한 교회의 요구들’을 기꺼이 드넓게 수용한 것입니다. (ibid., III-IV, passim) 

베로니카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오! 죄인 여러분, 예수님의 마음에 다가가십시오. 그분의 지극히 보배로운 피로 깨끗해지십시오. 그분께서는 두 팔 벌려 여러분을 안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Ibid., II, 16-17) 불타오르는 사랑에 고무된 채, 그녀는 수도원의 자매들을 돌보아주었고 이해해주었으며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녀는 교황과 주교와 사제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포함한 궁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와 희생을 바쳤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했습니다. “우리는 영혼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며 설교할 수 없습니다만, 우리는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우리 자신들의 고통으로, 즉 십자가가에 못 박힌 생활의 원칙으로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Ibid., IV, 877) 우리의 성녀는 이 사명을 사람과 하느님, 죄인들과 그리스도 사이의 ‘한 가운데에 있음’으로 이해했습니다. 

베로니카는 ‘기쁨으로 고통 받는 것’이 ‘사랑의 열쇠’임을 확신하여 예수님의 고통 받는 사랑에 깊이 동참하여 살았습니다. (cf. ibid., I, 299. 417; III, 330. 303. 871; IV, 192). 성녀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만으로 고통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세기를 거슬러 교회의 시대 안에서, 탄탄하고 한결같은 믿음 때문에 그분의 충실한 종들이 견뎌야 할 바로 그 고통들 때문에도 고통을 받으신다고 증언합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그분께 뽑힌 이들, 그분께 가장 귀중한 영혼들, 즉 그분의 피와 그분의 모든 고통에서 이익을 얻을 그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 모두를 보고 느끼게 하셨습니다.”(ibid., II, 170)라고 그녀는 기록했습니다. 

마치 사도 바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세서 1:24) 

베로니카는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락해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했던 지점에 다다랐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곧바로 나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상처들로부터 빛나는 광선 다섯 개를 보았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다 나의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광선들이 작은 불혀들처럼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불혀에는 못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불혀에는 마치 황금처럼 새하얗고 시뻘겋게 달궈진 창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창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내 심장을 관통했습니다. 그리고 못들이 내 손과 발을 뚫었습니다. 나는 크나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안에서 나는 내 자신이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변모되어 있음을 보았고 느꼈습니다.”(일기, I, 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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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는 자신이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영원한 복을 기다리면서, 그 ‘복된 (천상)고향’의 모든 성인 성녀께 자기 봉헌의 이 지상 여정에 와서 도와주길 간청하였습니다. 그 영원한 복에 이르는 것은 그녀 인생의 끊임없는 열망이었습니다.(cf. ibid., II, 909; V, 246) 

각 개인상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진 그 당시의 설교와 관련하여, 베로니카는 하늘나라를 향하는 길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와의 친교 의식으로서 강한 ‘결속 의식’을 보여주며, 그들 모두를 위해서 살고 기도하며 고통을 받습니다. 끝에서 두 번째의 것들, 지상의 것들은 비록 프란치스칸 식으로는 하느님의 선물로 고맙게 여겨지긴 했지만, 항상 비교되어져, 항상 하느님께 대한 ‘맛’에는 완전히 부차적이며 근본적 가난의 표시 아래에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Communion Sanctorum(성인들의 통공)에서 성녀는 몸소 자기 자신을 교회에 내주는 그 일을 순례하는 교회와 천상 교회 간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성인 성녀들은 예수님의 공로와 수난을 통하여 저 위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해 오신 그 모든 일에 협조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온전히 바로잡히어 규제된 것이었습니다.”(ibid., III, 203) 

베로니카의 글에서 우리는 수많은 성경 인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인용들은 가끔 간접적이긴 하지만 항상 정확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길러준 성경 본문에 익숙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베로니카의 신비적 체험의 그 강렬한 순간들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경청이 특별한 자리를 잡고 있는 전례 안에서 거행되는 구원의 사건들과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경은 베로니카의 체험을 비추고 정화시키고 확인해주어 그 체험이 교회의 것이 되게 해줍니다. 반면에, 예사롭지 않은 강렬함으로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그녀의 체험은 더욱 더 말씀 그 자체의 심오하고 영적인 독서에로 이끌어주고, 그 속에 감쳐진 깊이에로 들어가게 해줍니다. 성녀는 거룩한 성경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며, 그 말씀은 성녀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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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우리의 성녀는 사도 바오로의 다음 표현을 자주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서 8:31; cf. 일기, I, 714; II, 116.1021; III, 48). 

바오로 사도의 이 성구에 대한 소화, 즉 그녀의 크나큰 신뢰심과 심오한 기쁨은 성녀의 인격 안에서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영혼은 하느님의 뜻에 연결되어 있으니, 나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에 고정되고 확고해졌습니다. 내 보기로는, 이러한 하느님의 뜻에 나는 결코 다시 분리되어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음의 이 말씀들에 대해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아무것도 나를 하느님의 뜻에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걱정도 슬픔도 노고도 멸시도 유혹도 피조물들도 악령들도 어두움도 죽음도, 왜냐하면 죽으나 사나 나는 그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 그 전부를 원하기 때문입니다.’”(일기, IV, 272) 이리하여, 우리에게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확고해져 있으므로 진실로 영원한 생명 안에도 확고해져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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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베로니카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끌고 자신을 만연케 하며 불타오르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그 아름다움과 힘에 대한 용감한 증인임을 보여줍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일어난 것처럼, 예수님의 오상으로 십자가에 못 박이신 사랑'이신 그분께서 성녀에 육신에도 '깊이 새겨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나의 신부여, 내 은총 바깥에 있는 그 사람들을 위해 네가 해주는 보속행위들은 나에게 귀중한 것이다.’라고 속삭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두 팔에 있은 내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내가 경험했던 것을 나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영원토록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옆구리 안에 머물러 있고 싶어졌습니다.”(ibid., I, 37)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포옹 안에 있음, 그리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 이것 또한 성녀의 영적 여정, 성녀의 내적인 삶의 심상인 것입니다. 

또한, 베로니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의 깊고 친밀한 관계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성모님께로부터 직접 들어 일기에 기록한 다음의 말로 입증됩니다. “너를 내 가슴에 쉴 수 있게 해 주겠다. 너는 내 영혼과 일치되어 있으니, 하느님께 비상하듯 이르게 되었다.”(IV, 901)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는 우리를 초대하여 그리스도교 생활을 주님의 뜻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와의 일치에 온전하고 완전한 신뢰심으로 우리 자신들을 맡겨드려, 타인들을 위하여 살아감으로 이루어지는 주님과의 일치를 발전시키도록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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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모든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고통스러운 사랑 안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녀는 우리의 시선을 우리의 지상여정의 목적지인 하늘을 향해 고정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수많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우리 삶의 방향을 잡아주고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매일 우리 자신을 기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성녀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열정적인 신비적 체험에 대한 요약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사랑께서는 당신 자신이 발견 되는 것을 하락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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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카푸친작은형제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