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San Bonaventura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BONAVENTURE, BISHOP AND DOCTOR, I Order -- Feast
1. 성 보나벤뚜라의 생애
성 보나벤뚜라의 중부 이딸리아 박뇨 레지오에서 1217/1221년에 탄생하였다. 성인께서 태어난 지 일년이 채 되지 않아서 매우 심하게 아팠다. 그때 마침 성프란치스꼬께서 보나벤뚜라 성인이 살고 있는 도시를 지나가게 되었다. 성인의 어머니께서는 아기를 안고 성프란치스꼬가 지나갈 때 아픈 아기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성프란치스꼬께서 그 아기를 보자마자 단지 “Oh! Bona ventura”라고 말하였다. 이 뜻은 “오! 참 좋은 행운이여”라는 뜻이다. 그러자 아기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아기의 이름은 보나벤뚜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후 보나벤뚜라 성인은 17세에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다. 그후 빠리대학에서 수학하고 다시 그곳에서 강의하였다. 37세에 프란치스꼬 수도회 총장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는 그 당시 일어났던 어려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해졌다. 그 어려운 문제들 중에서 특히 성직자의 규율문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에서의 곤란한 일 그리고 동방교회를 로마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일들이었다.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황은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위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하여 그 시대의 권위있는 학자들을 불렀다. 교황께서 부른 학자들 중에는 보나벤뚜라 성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은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리용 공의회를 하면서 보나벤뚜라 성인은 운명하였다.
이제 보나벤뚜라 성인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자. 성인에 대해서 크게 4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교회 학자로서의 성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가 프란치스꼬회 들어갈 때는 청년이었다.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한 후 그는 빠리대학에서 열정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매우 착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기에 빠리대학 교수였던 알렉산더는 “보나벤뚜라는 원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알렉산더 교수 수하에서 보나벤뚜라는 지혜와 완덕에 있어서 날로 진보하였다. 그는 27살부터 자기가 공부하던 빠리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강의를 하였다. 우리 교회에서 보나벤뚜라를 세라핌적인 학자라고 한다. 이는 그가 “지혜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말하였고 또 그렇게 생활했기 때문이다.
보나벤뚜라는 “우리 지능을 밝히는 빛이 우리 마음까지 감동을 시키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빛이다.”라고 말하였다. 자기가 하느님의 사랑을 불태우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위대한 학자로서 그는 우쭐거리지도 않고 작은 형제처럼 겸손하게 살았다.
어느날 그는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할머니가 “보나벤뚜라가 이렇게 큰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하느님께서 잘 알고 있으니 죽은 후에 틀림없이 천당에 가게되어 하느님의 가장 앞자리에 앉으실 것입니다.”하고 말하자 보나벤뚜라는 “나보다 할머니가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한다.
2) 대 성인으로서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가 사람들의 정신을 지혜롭게 밝혀주며 마음을 훈계하고 하느님의 사랑에까지 이르도록 하였다. 어느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뚜라를 찾아와서 “어디에서,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배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보나벤뚜라는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나의 지혜의 샘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또 다시 어느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뚜라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때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꼬 성인의 전기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보고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인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성인을 방해선 안되지!”하며 발길을 돌렸다는 일화도 있다. 보나벤뚜라는 자신의 삶이기도 한 완덕으로 가는 길에 대하여 가르치는 많은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3) 프란치스꼬 수도회 총장으로서의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는 빠리 대학에서 오랫동안 가르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약관 37세에 수도회 총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성 프란치스꼬가 돌아가신지 3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프란치스꼬 성인이 세운 수도회는 날로 발전하고 커져만 갔다. 보나벤뚜라를 일컬어 “제2의 창설자”라 불릴 정도로 수도회의 조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특히 프란치스꼬 성인이 만든 회칙을 시대 상황에 맞게끔 형제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작은 형제회의 첫회헌 “나르보나 회헌”(Narbona)을 만들었다.
4) 알바노의 추기경으로서의 보나벤뚜라
성교회는 교회에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보나벤뚜라의 지혜와 성덕을 높이 사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보나벤뚜라는 그 직책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회칙의 정신에 따라 순명할 수밖에 없었다. 추기경 임명장을 가지고 왔던 전달자는 보나벤뚜라를 부엌에서 만났다고 한다.
1274년 추기경으로써 제2차 리용 공의회에 참석 중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2. 성 보나벤뚜라의 연보
작은 형제회는 사부 성 프란치스꼬 이래로 별처럼 빛나는 많은 성인을 배출하였다. 비록 드러남이 없는 숨겨진 생활 속에서도 그분들이 끼친 성덕의 향기는 작은 형제회를 더 향기로운 단체로 만들고 있다.
뭇별들 가운데서 샛별만이 다른 별들이 모두 잠든 새벽까지 찬란한 빛을 잃지 않는 것처럼 보나벤뚜라 성인은 작은 형제회 안에서 시대의 흐름에도 구애됨이 없이 빛나는 샛별과 같은 존재이다.
그분의 겸허한 수도자로서, 학자로서, 총장으로서 서로 조화시키기 힘든 상반된 면모를 훌륭히 결합시켜 후세의 모범이 되었으니 비록 총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아래서도 작은 형제로서의 모습을 조금도 손상함이 없이 겸손과 고행으로 일관된 생활을 하셨으며, 자칫하면 학문을 업신여기기 쉬운 작은 형제들의 생활에서도 수많은 저술과 강의로서 수도생활의 활력은 물론 교회 신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는데, 특히 토마스 일변도의 사변 위주로 흐르는 중세 신학에 정적 사랑의 훈기를 불어넣음으로 경화되기 쉬운 교회에 넘치는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학자인 성인은 철학자로서 보다 신학자로서 더 유명하니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등한 자격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신비 신학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체계에서 철학적인 요소만 추출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철학의 목적과 신학의 목적 사이에 일련의 연속성을 제시하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철학이 비록 제한을 받는 상태이긴 해도 독자적인 자유성으로 진실을 추구하고 있으며 철학이 가져오는 지식은 인간의 마음을 가없이 상승시켜 진리에 이르게 하는 무대로 보았다.
그는 성 프란치스꼬와 같이 신비적인 방법에 의하여 성취된 하느님께 대한 지식만이 생명을 낳아 참된 지식으로 보았다. 총장으로써 그는 너무나 어렵고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으니 초창기에 적은 수였던 형제회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급히 성장함에 따라 예기치 못했던 많은 어려움 들이 야기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요아킴 원장의 사건인데 그의 과격한 신비적 이단사상에 많은 형제들이 동조하고 심지어는 전임 총장이었던 파르마의 요한까지 여기에 동조하자 형제회가 분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탁월한 덕행을 겸비하고 그 성덕을 인정하는 전임 총장을 단죄한다는 것은 크게 난처한 일이었으나 성인은 과감히 단죄함으로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르보나 회헌을 작성하여 형제회의 기초를 굳혔으며 당시 여러 가지로 나돌고 있던 사부 프란치스꼬의 전기로 인한 분쟁을 일소하기 위하여 새로운 전기를 만들기로 하고 아씨시와 라베르나에 몸소 가셔서 아직 생존중인 사부님의 동료들을 만나 그분들의 진술을 참고해서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부님의 전기를 만들었다. 여기서 성인은 현대 역사가들이 사용하는 방법, 즉 연대기적인 형태로 서술하기보다는 사부님의 영적인 초상화를 그림으로서 모든 이에게 성덕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제까지 수도자로서 학자로서 총장으로서 성 보나벤뚜라의 면모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오늘날 어느 시대에 비길 수 없을 만큼 고전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는데 그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탁월한 이유중의 하나는 비록 오늘 우리가 지닌 지혜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며 찰나적이며 편리한 것보다는 영성적인 것의 우위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라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 성 보나벤뚜라를 고찰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믿으며 성인의 생애와 사상 이해에 다소나마 보탬이 될까하여 아래에 성인의 연보를 간략하게 기재하다.
1217이탈리아 박뇨 레지오에서 출생
1226소년시기에 병이 들었으나 그의 어머니가 프란치스꼬에게 전구하여 병이 회복됨
1235-1243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 득할 때까지 수학함
1243파리에 있는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고 로마관구에 등록함 수도원에서 알렉산더 할레스 문하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그의 사망 후 (1245) 오도네 문하에서 연구를 계속함
1250-1252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룸바르두스이 명제집” 저술
1253-1257파리대학에서 교수생활을 계속하면서 그의 사상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인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3편의 토론집을 완성함
1254-1257작은 형제회 신학교의 책임자가 됨
로마에서 교황 알렉산더 4세가 참석한 회의에서 프란치스꼬회 총장으로 선출됨
1257.4작은 형제회 첫회헌 작성(파리에서)
1259프랑스 관구 총회 개최
라베르나산에서 “영혼의 여정” 저술
1260라르보네 총회(나르보네 회헌 작성)
성녀 글라라 귀천
1261파리와 이탈리아에서 거주
1262“성 스테파노의 발견” 강론
1263빠도바의 성 안또니오 귀천
1265클레멘스 4세가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사양함
파리에서 총회 개회(여기서 유명한 “성 프란치스꼬에 대하여” 강론)
1267독서 강화집 “십계명에 대하여” 저술
1268독서 강화집 “성령칠은에 대하여” 저술
1270스페인과 독일에서 체류
1272로마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대관식에 참석 리용총회 참석
1273독서 강화집 “창조의 여섯째날” 저술후에 인노첸시오 5세가 된 도미니꼬회의 뻬드로네프란타샤와 후에 요한 21세가 된 빼뜨로 히스파뇨와 함께 알바뇨의 주교겸 추기경으로 임명됨
1274총회 개최 여기서 예로시모 형제가 총장으로 선출됨. 제4차 리용 공의회 참석
1274.7.15공의회 도중 귀천
리용의 프란치스꼬 수도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은 교황이 주례하고 공의회에 참석했던 모든 교부들이 참석
1482교황 식스또 4세는 칙서 "천상 고향 예루살렘""으로 보나벤뚜라를 성인품에 올림
1587교황 식스또 5세는 칙서 "환호하는 예루살렘"으로 보나벤뚜에게 "교회박사" 의 칭호를 내림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홈페이지에서>


1274년 7월 15일 아침,
제2차 리옹 공의회 도중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와 회의에 참석한
사제들은 알바노의 주교 보나벤투라가
새벽녘에 병환으로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역사가는 프란치스코회 추기경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그는 뛰어난 학자,웅변가,탁월한 성인으로서 친절함과,
가까이 하기 쉬운 소박함과, 온유함과 동정심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그의 완덕 때문에 하느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장례 미사에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고, 주께서 그에게 이 같은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에
그를 알게 된 사람은 누구든지 그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보나벤투라는 중세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자 사상가 중의 한분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인으로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세라핌 박사’로 알려진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는데,’베드로 롬바르드의 금언에 관한 주석’,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세 갈래 길’, ’완덕생활’ 등의 영성 서적을 비롯하여
성서 주석, 약 5백편의 설교 등이 특히 유명하다. 성인은 식스토 5세에 의하여
교회박사로 선언된 위대한 프란치스칸이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와 더불어 교회 신학계의 쌍벽(雙壁)이 되는 성 보나벤투라, 그가 남겨놓은 업적은 중세기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찬란히 빛나고 있다. 이 두 신학자는 그 저서와 제자들의 많음에도 서로 손색이 없으며, 토마스가 그 가르침이 밝고 심원한 의미에서 천사적인 박사라고 불린다면, 보나벤투라는 오히려 경건하고 사랑이 흐르는 면에서 세라핌적인 박사라고 불리어진다.
또 성 토마스가 논리적(論理的)이라면, 성 보나벤투라는 오히려 심리적(心理的)이어서 그 문장의 감미롭고, 아름답고 고움은 비할 바가 없다.
두 분은 다 수도자이다. 성 토마스가 도미니코회의 영향을 받아왔음에 반해, 성 보나벤투라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회의 영향을 받았고, 양자가 그들 수도회의 제2의 창립자라는 명칭을 받을 만큼 그들은 바른 언행으로 사람들의 거울이 되었다.
보나벤투라가 중부 이탈리아의 바뇨레아에서 태어난 때는 1221년경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생존시였다. 죠반니 디 피단짜가 그의 이름인데,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보나벤투라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이름이다. 그의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어릴때에 큰 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했으므로, 신심이 두터운 그의 어머니는 그를 성프란치스코께 데리고 가서,
만약에 완쾌되면 장래에 수도원에 보낼 서약 아래 성인께 기도와 강복을 청한 결과 즉시 쾌유되었다. 성인도 대단히 기뻐하며 " 오! 보나벤투라(기쁜 일이여)"라고 외쳤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을 보나벤투라라고 불렀고,
과연 그가 17세때에 그의 어머니는 서약대로 그를 수도원에 보내었다. 수련을 끝마친 후 보나벤투라는 우선 올비에트에서 일반 학문을 연구하고 1238년에 영국의 유명한 알렉산데르 헬이스 문하에거 공부하려고
파리대학으로 갔으며, 그의 총애 받는 제자가 되었다.
그는 20세에 신품을 받아 얼마간 그 수도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248년부터 1255년까지 아직 26세의 젊은 몸으로 파리 대학에서 신학과 성서를 가르쳤다.
그 해 성 토마스 데 아퀴노도 같은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리하여 두분은 서로 친구가 되어 거룩한 동반자로 서로 격려하고 연구해 중세기 신학의 기반을 확립함에 전력했다.이쯤 되니 각국에서 젊은 학생들이 그들의 학덕을 흠모하여 서로 앞을 단투어 그들의 슬하게 운집하게 되었고, 그들의 명성은 그들 주위를 위압하게 되었다.
높은 나무는 바람에도 세차게 부딪치는 법이다. 그들이 명성이 세상에 널리 떨치자 질투를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비방하고 수도회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들의 수업은 새로운 탁발 수도자를 반대하던 교수들 때문에 중단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쌩-아무르의 윌리암을 비롯한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항해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 논쟁에 뛰어들어서"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남겼다.
마침내 12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쌩-아무르를 단죄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켰다.
그는 이런 이들에게 대해 유화하고 온순한 어조로써 수도회의 존재 이유와 필요성을 부드럽게 설명하고 반박한 결과, 그렇게도 시끄럽던 잡음은 씻은듯이 없어지고 다시는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게끔 되었다. 성인이 사람들의 찬양을 받게 된 것은 위의 사실로도 나타난 바와 같이 그 학식의 풍부함보다도 그 두터운 애정에 더욱 기인하는 것이라 하겠다.
탁발 수도회가 파리에서 다시 부흥될때, 그는 토마스 데 아퀴노와 함께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서의 직무를 완수하는 동시에 다수의 서적을 저술했는데, 어떤 날 성 토마스가 방문해 "당신에게 제일 유익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하니 보나벤투라는 ’내가 제일 많이 배웠고, 또 배우고 있는 책은 이것입니다"하고 십자가를 가리켰다고 하니, 얼마나 경건한 태도이며 아름다운 일인가!
성인은 파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지 8년째 되던 1257년에 열린 프란치스코의 총회석상에서 관구장과 기타 요직 전원의 추대를 받아 36세로서 프란치스코의 총장에 취임했다. 그 당시 회 창립자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었지만, 아직 통계적이고 조직적인 전기는 한권도 없었다.
그래서 성인은 회원의 위촉를 받아 비로소 그 편찬에 착수하고 자료의 선택, 정성들인 배열 순서에 그의 달필(達筆)을 휘둘러 과연 기대에 알맞는 훌륭한 전기를 완성했다. 그것이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전"인데, 전후 700년간에 걸쳐 수백 판을 거듭해했고 각국어도 번역되어 수많은 애독자를 갖게 되었다.
그 전기의 집필 중의 일이다.
어떤 날 설 토마스가 2,3명의 제자와 같이 그를 방문해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어찌된 일인가 하고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성인은 책상 앞에 무릎 꿇어 기도하는 자태로 그냥 탈혼이 되어 있었다. 이것을 본 성 토마스는 “성인이 성인의 행적을 쓰는데 방해해선 안 된다”하고 사람들을 재촉해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이것을 보아도 성인이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편찬하는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1260년, 나르본느에서 열신 수도회의 총회에서, 그는 오랬동안 수도회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는 회칙에 대한 회헌을 선포했다. 총장이 된 그는 회원들로 하여금 성 프란치스코가 제정한 규율을 엄수하도록 하기 위해 친히 모범을 보이며 필설로써 부드럽게 설득하고 기회 있는대로 각 수도원을 순방하며 시찰했다. 그러자 다른 동료 수도자들 중에 신앙에 냉담했던 이들까지도 거룩한 열(熱)에 타게 되어 수덕에 더욱 힘쓰지 않을 수 없었다.
1265년, 교황 클레멘스 4세는 그를 영국의 요크 시의 총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으나, 겸손한 그는 마침내 그 직책을 거절했다.
보나벤투라만큼 성모 마리아를 공경한 이는 아마 성인들 중에서도 드물 것이다. 그는 총장이 된 이후에도 매 토요일마다 수도원 부속 성당에서 성모 찬송 미사를 드렸고, 만종(晩鐘)이 울릴 때마다 성모송을 외우며 기원의 현의를 묵상했으며, 수하 수사들오 하여금 기회 있을 때마다 이것을 신자들에게 장려케 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 세계에서 신자들이 매일 세 번씩 외우는 삼종기도의 시작이었다.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의 총장이면서도 파리에 체류하면서 강의와 설교를 했으며, 특히 프랑스 왕 루도비코 9세와 그 왕족들 앞에서 설교하는 영광을 얻었다. 1273년 봄, 그가 53세 된 때 파리 대학의 교수들과 수도자들을 상대로 천지 창조의 6일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로부터 -그는 1271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선출을 적극 지지했었다. 그를 알바노 지방의 주교인 동시에 추기경으로 임명할 터이니 이번은 사양치 말고 승낙한 후 즉시 로마로 귀환하라는 명령의 서한이 도착했다.
그는 즉시 파리를 출발해 로마로 향하던 도중 무제로라는 곳에 있는 작은 수도원에서 일 박을 했는데, 때마침 추기경 임명 칙서를 휴대한 교황 사절이 그곳에 도착했다. 그때 보나벤투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부엌에서 식기를 씻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겸손지덕을 닦기 위해서이지만,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더욱 겸손해지는 이 성인에게서 우리는 진실로 배울 것이 많다.
그의 겸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그는 교황 우르바노 4세로부터 성 토마스와 더불어 성체 찬미가를 작사(作詞)하도록 분부 받았다. 그리하여 두 분은 서로 최선을 다해 작사를 했다가 서로 대조하기 위해 먼저 성 토마스가 지은 가사를 읽었을 때, 보나벤투라는 “아! 참으로 훌륭합니다”하며 자신이 애써 지은 성시(聖詩)를 즉석에서 찢어 버렸다고 한다. 이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토마스의 작품인 “성체 찬미가 -엎디어 절하나이다”는 지금도 교회 예식 중에 아름답게 흘러나오는데, 우수한 시인이었던 보나벤투라의 주옥같은 이 작품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1274년에 그레고리오 교황은 로마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용 공의회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그를 위촉했다. 그 회의의 결과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는 일시 합동이 잘 되었는데, 이는 보나벤투라의 정(情)과 이(理)를 경주한 명토론의 결정이었다. 양 교회 합동을 기념하는 축하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을 기해 행하여졌다. 그 자리에서 성인은 교황을 비롯해 공의회에 참석한 교회 학자 주교들의 위풍 당당한 가운데서 일장의 강론을 했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 마지막 강론이 되었다.
쌓이고 쌓인 그의 피로는 그를 병석에 눞게 했고,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교황께 병자 성사를 받고 십자가를 우러러 사랑하는 예수의 곁으로 떠난 것은 불행하게도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기 중인 1274년7월14일 밤 리용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장례식은 교황과 다수의 고위 성직자의 참석 하에 대성황을 이루었다. 보나벤투라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의 한 분이다.
세라핌 박사로 알려진 그는 수많은 글을 썻고, 또 남겼는데, “베드로 룸바르드의 금언에 대한 주석”,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전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 “세 갈랫 길”, “완덕 생활”등의 영성 서적을 비롯해, 성서 주석, 약 5백 편의 설교 등이 유명하다. 그의 저서 가운데 그의 심원한 학식과 그의 경건한 심정이 엿보이지 않는 곳은 한 장도 없으므로, 성 토마스 데 아퀴노와 더불어 교회 신학계의 혜성으로서의 추앙을 받음은 극히 지당한 일이라 하겠다.
돌아가신 지 9년 후, 교황 식스토 4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고, 1588년, 교황 식스토 5세로부터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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