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8일 복자 요한 둔스 스코투스 사제
Beato Giovanni Duns Scoto, Blessed John Duns Scotus, I Order
Beato Giovanni Duns Scoto
Blessed John Duns Scotus
The Subtle Doctor; Joannes Scotus; Doctor Subtilis
Born: 1266 at Duns, Berwick, Scotland
Died: 8 November 1308 of natural causes at Cologne, Germany;
buried in a Franciscan church near the Cologne cathedral
Name Meaning: God is gracious; gift of God (John)
Beatified: 20 March 1993 by John Paul II (cultus confirm!!!ed)
1265년 요한 스코틀랜드의 Duns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 삼촌은 그 당시 스코틀랜드 감목구장이었던 Elias이다.
1278년 둔스의 요한은 Haddington에 있는 프란치스칸 학교에 입학하였고,
Dumfries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더 높은 차원의 학문 공부를 위해 옥스퍼드와 파리로 보내졌다.
1291년 3월 17일 그는 Northampton에서 Lincoln의 주교였던
Oliver Sutton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캠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철학과 신학 교수로 일하였다.
파리 대학의 프란치스칸 학부에서도 가르쳤는데, 그 후 그는
보니파시오 3세 교황을 대항하여 프랑스 국왕 편에 서는 것을 거부하였기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이것은 1303년의 일이었다.
둔스코투스는 그 당시 총봉사자였던 Valboa의 Gonzalvus의 추천으로
1305년 파리 대학에 복직되었다.
그는 1307년 다시 파리를 떠나 쾰른에 있는 작은 형제들의 학교로 갔다.
그는 1308년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둔스의 요한은 프란치스칸 학파의 신학자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의 수호자로 유명하게 되었으며,
또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서, 특히 쾰른과 이태리의 Nola에서 공경되기 시작하였다.
1991년 7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둔스 스코투스를 복자품에 올렸고,
1993년 3월 20일 그를 공경하는 전례를 거행하였다.
(프란치스칸 신학자들과 교회학자들 -작은형제회홈에서)
그는 옥스퍼드에서 일어난 새로운 자연 연구의 영향과 프란체스코회의 신학적 노선 아래에서 아우구스티누수의 영향을 받아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반대하고 중세철학을 점차 르네상스로 인도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기독교의 유신론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에 대한 존재의 논증을 비판하였다. 본래 논증은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이끌어내야 하는데 거꾸로 결과로부터 원인을 증명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증명은 이성적인 논증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성의 논증을 행하는 철학과 계시에 바탕을 두는 신학을 가르는 길이 열렸다. 또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의 개별성을 존중하여 개별성이야말로 사물의 본질을 완성시키는 최종적 요소라고 하였다.
프란치스칸 신학적 성향을 따르면서 '사랑'을 기초로 하고 사랑의 빛으로 받은 새로운 사고의 종합을 이루었다. 의지의 우월성을 두는 주의주의를 펼쳤다. 의지는 독립적이고, 정신활동을 지배하며 인간에게 개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았다. 프란치스칸 그리스도중심주의는 스코투스의 종합 안에서 '육화이유'와 더불어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즉, 말씀은 우선적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한 존재를 자신 밖에서 찾아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실에 있어서는 보편성과 개별성이 동등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하여 종래의 보편성 우위에 반대하고 개별성의 입장을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렸다. 이것은 후에 윌리엄 오컴에 의한 개별성 우위의 사상으로 발전한다. 지성과 의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직관(直觀)의 인식을 중요시하여 의지의 우위를 말하고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인식을 존중하였다. 그의 논법은 미세한 점까지 파고들었으므로 '영민한 박사'(Doctor Subtilis)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그의 독창적 사고는 스콜라 철학에 머무르면서도 토마스 주의를 비판하여 새로운 철학의 길을 준비하였다.
주요작품으로 'Opus oxoniense'와 'Opus parisiense' 2부로 구성된 명제집 주석서가 있다.
신이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고, 어떤 근거 없이도 존재하는 무한자(無限者)로, 신은 그의 의지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의지가 선악의 최고원칙이라고 주장하는 둔스 스코투스는 의지를 오성(悟性)보다 우위에 두었다.
인간에 있어서도 의지가 이성보다 우위에 있으며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어떤 행위를 할 때 오성은 단지 이성의 보조원인(causa subserviens)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서의 행위는 인간 의지의 자유에 의해 선택된 행위이고, 이 행위의 선악도 신의 의지와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서방 교회 인물들 중에서 마리아의 ‘성화(聖化)’와 ‘원죄 없는 잉태’ 교리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논문으로 제시한 인물은 켄터베리 대주교 성 안셀모의 동료이자 전기작가로 더 잘 알려진 에드머이다. 그는 나중에 대주교의 조카인 소안셀모에 의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와 성 토마스 데 아퀴노 등 몇몇 걸출한 위인들은 마리아가 다른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원죄를 지닌 채 잉태되었으며, 다만 나중에 모태 안에서 정화되어 원죄가 사해졌다고 보았다. 웨어의 윌리엄, 복자 요한 둔스 스코투스 등은 이러한 의견에 반대하여, 마리아가 잉태된 첫 순간부터 원죄가 사해졌다는 무염시태 가르침을 고수하였다.
동방에서는 이미 초창기부터 널리 퍼져있던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개념은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방에서도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도미니코회는 마리아의 완벽한 성덕과 무죄함은 인정했지만,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이는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편적 능력을 삭감하는 것이라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여 프란치스코회는 둔스 스코투스가 주장한 선행구속론(先行救贖論)으로 맞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의 원죄없음이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능력을 삭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이해 하였다.
그는 세가지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한 순간도 원죄의 지배 하에 있지 않도록 하실 수 있다.
둘째, 어느 한 순간만 원죄의 지배 하에 있게 하실 수 있다.
셋째, 마리아가 원죄의 지배를 받더라도 일정 시기가 지난 다음 원죄로 부터 성화하실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 세 가지 가능성에서 가장 좋은 것을 마리아에게 이루셨으리라고 확신하였다.
이로써 "하느님은 하실 수 있었고, 원하셨으며, 따라서 그렇게 하셨다."
(Potuit, voluit, fecit)라는 유명한 공식이 성립되었다.
나중에는 가르멜회와 아우구스티노회도 프란치스코회의 주장에 동조하며 무염시태 교리를 옹호하고 나섰다. 결국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를 두고 가톨릭 신학자들 간에 논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학 논쟁이 치열해지고 무염시태를 반대하는 도미니코회원들과 무염시태를 옹호하는 프란치스코회원들 간에 대결과 충돌이 갈수록 거세어지자, 처음에는 그저 중립을 유지한 채 관망만 하던 교황청도 교화 안의 평화를 위해 결국 개입하기로 하였다. 교황 식스토4세는 교황 헌장을 잇달아 반포하면서 앞으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관하여 논쟁하거나 상대를 서로 단죄하지 못하도록 엄금하였다. 그러나 1476년 그는 원죄 없이 잉태된 마리아 축일을 인가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원죄 없이 모태에 배이신 자’로 마리아를 호칭하는 것을 승인했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복자 비오9세는 1851년부터 1853년까지 세계 모든 가톨릭 주교들의 자문을 받아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져온 로마 가톨릭 신자들의 성모 신심과 봉헌, 교부들의 증언,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하여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반포함으로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음을 로마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의로 선포하였다.
1858년 루르드의 성모 발현으로 무염시태 교의는 사실상 진실로 입증한 셈이 되었다. 프랑스 루르드에서 14세의 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르에게 한 아름다운 귀부인이 나타나 그 지방언어로 “나는 원죄 없는 잉태다.”라고 말하였다. 당시 베르나데트는 원죄 없는 잉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귀부인이 바로 성모 마리아라고 믿고 있다.
<루르드 대성당 앞에 있는 벽화와 성상>
가운데: 성체운동의 수호성인 성파스칼 바이런
오른쪽: 예수성명 IHS 신심의 시에나의 성베르나르디노
왼쪽: 복자 둔스 스코투스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의 수호자이며,
1991년 7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음.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12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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