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성인

11월28일 마르케의 성 야고보 사제

김영중 미카엘라 2018. 5. 31. 14:30

11월28일 마르치아의 성 야고보 사제

San Giacomo della Marca Sacerdote ,James of the March, priest, I Order -- Memorial

출생: 1394, Ascoli Piceno

선종: 1476.11.28 나폴리

시복: 1624. 교황 Urban 8tp

시성: 1726. 교황 베네딕토 13세

성 야고보(Jacobus)는 이탈리아의 간갈라(Gangala) 집안 출신으로 마르케 지방 안코나(Ancona)의 몬테브란도네(Montebrandone)에서 가난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도미니코였다. 양친은 매우 열심한 신자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친척되는 한 신부에게 양육되어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이어 아수코리에 있는 프란치스칸 수도원과 도미니칸 수도원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후에 페루지아 대학에서 법학을 연구해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Bibbiena와 Porziuncola에서 작은 형제들과의 접촉을 갖게 되면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1416년에 아시시(Assisi)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아시시 외곽에 있는 카르첼리수도원에서 인문학과 신학을 계속 공부하였으며 1422년 그곳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수련기를 마치고, 피에졸레(Fiesole)에서 시에나(Siena)의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5월 20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료는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로서 한 지붕 밑에서 세 명의 성인이 기거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야고보도 될 수 있는 한 사부(師父)를 본받아 기도와 묵상과 고행을 했다.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원장인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그의 극기 금욕의 혹심함이 건강에 해로움을 줄까 염려해 완화하기를 엄명할 정도였다. 
29세의 나이로 사제가 된 그는 즉시 토스카나(Toscana), 움브리아(Umbria) 그리고 마르케 지방 등을 돌며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을 더욱 단련하기 위하여 하루에 3시간만 잠을 잤고, 대부분의 시간은 책 사본을 만드는데 보냈으며, 항상 다 헤어진 의복만을 입고 지냈다.

교황들은 좀 복잡한 선교를 해야 할 때면 야고보를 그 선교지에 자신들의 대사로 보내곤 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가 간 곳은 헝가리,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폴란드이다.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간은 이태리의 도시들에서 설교를 하는 데 소비하였다.


그는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군중들의 일상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대중신심을 독려하였고, 신앙의 여러 진리를 가르쳤다. 특히 고해성사와 성찬례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곤경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고취하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매우 윤리적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멸망과 나머지 그리스도교 세계가 곧 마주할 종말은 모두 남색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 말하였다.  당시 프라티첼리 라는 이단을 제거하는데 많은 노력을 한 그는 종교재판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야고보가 주창한 일들 중 한 가지는 “Monti di Pieta(신심이 산)”라는 것을 창립한 것인데,

이것은 중세의 은행의 일종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이 아주 저렴한 이자로 대부를 받아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은행의 금융 지원은 주로 큰 도시와 국가의 경제생활 영역에 참여하지 못하는 지역에 제공되면서 전반적인 경제 안정을 불러왔고, 최상위 계층과 최하위 계층 간의 격차를 줄여나갔다.

이것이 바로 이태리에서 Observant들이 했던 위대한 사회 개혁들 중의 하나로서,

고리대금을 근절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또한 프란치스코 수도회 내의 개혁 운동(Observant 개혁 운동)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와 요한 카페스트라노, 사르테아노의 알베르토와 함께 준수형제회가 은둔자적 형태의 삶에서 탈피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작은 형제회와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 간의 화합을 위하여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는 밀라노(Milano)의 주교로도 천거되었으나 거절하였다.





야고보는 미래를 통찰하는 은혜를 받았다. 1464년 그 회의 총장 선거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그를 최적임자로 지명했으나 야고보는 대답하기를

"사본느의 프란치스코 신부가 좋을 것입니다. 그는 후에 추기경이 되고 교황이 될 위대한 인물입니다"했다.

과연 그의 예언이 적중되어 사본느의 프란치스코는 7년 후인 1471년에 교황에 당선되어 식스토 4세가 되었다.

 


야고보는 그 뒤 몸이 허약해져 때로는 완전히 기력을 잃을 정도였으나 최대의 힘을 다해 맡은 바 임무를 이행했다.

1472년에 나폴리 왕이 교황께 청해 야고보로 하여금 자기 나라에 와 설교를 하도록 했는데, 그는 마치 자기 몸을 채찍질 하듯이 이끌고 나폴리에까지 갔다.

그리고 동반자를 돌아보며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야고보는 그 후 4년간 나폴리와 국내 각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했다.

프란치스코회 수사로서 60년, 야고보는 천명이 다해 1476년 11월 26일에 나폴리(Napoli)에서 설교를 하던 중8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유해는 나폴리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며, 아직까지도 안색이 마치 산 사람 같다고 한다.


야고보를 묘사한 일부 작품은 그가 베르나르디노의 상징이었던 IHS(예수의 거룩한 이름) 표시위에 올려진 성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성 베르나르디노와의 유대를 나타내는 것이다.(그는 1450년 베르나르디노의 시성식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성배는  이단이었던 프라티첼리 사람이 그가  미사접전을 할 때 사용할 포도주를 독약으로 몰래 바꾸어 넣었는데, 놀랍게도 축성 예식 직전에 그 독약은 사라졌고 성배에서 뱀 한마리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성배에는 뱀의 문양이 있기도 하다.

 

 1624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detail of a portrait of Beato Giacomo della Marca; by Pietro Perugino, 1512-15; tempera on canvas, Gallery of Umbria, Perugia, Italy; swiped from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