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3일(4월4일) 성 베네딕토 흑인
San Benedetto il Moro Religioso , Benedict the Black, religious,
St. BENEDICT the Black, St. Benedict of San Philadelphio
1526년 이탈리아의 메시나 부근에서 태어났다.
1589.4월3일 자연사하였다.
몇년뒤 무덤을 공개했을 때 그의 몸이 섞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743년 5월 15일 베네딕도 14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비오8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베네딕토는 ’좋게 말한’ 또는 ’축복된’이란 뜻이다.
그가 흑인 베네딕토라 불리는 이유는 흑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뉴비아족(홍해 지방의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서에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대하십니다"(로마 2,11) 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쉽게 틀릴수 있는 인간의 판단과는 달라서 마음속까지 들여다보시는
전지(全知)의 판단을 하시고 모든 이에게 풍부한 은총을 베풀어주신다.
이제 말하려고 하는 흑인 성 베네딕토도 그 좋은 예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노예로서 무식했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쓰지 않고 완덕에 이르려 성심껏
노력한 결과, 위대한 성인이 되어 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이 성인은 1526년 이탈리아의 메시나 부근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노예 계급에 속한 흑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일찍이 자유의 몸이 되었고,
또한 장남인 베네딕토도 같이 해방시켜 주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다.
신분상으로는 정말 비천했지만,양친은 모두 신심이 깊어 자녀를 극히 경건한 사람으로
교육시켰다.
베네딕토는 장성하자 일찍부터 목동으로 소나 양을 지키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틈을 내어 늘 기도나 묵상을 했고
그럴 때마다 성령께서 친히 그에게 지혜를 비추어 주셨다.
그는 겸손의 덕을 닦을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목동들은 그의 성실한 점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얼굴빛이 검고 신분이
천한 것을 항상 조소했기 때문인데,
그럴 때마다 그는 비상한 인내심으로 모든 것을 참아 내었다.
그리고 여전히 어느 누구에게든지 사랑으로써 친절히 대했다.
이와 같은 그의 덕행은 하느님께 의합하게 되어 한층 더 풍부한 은총을 받게 되었다.
18세 때에 그는 밭을 갈기 위해 황소 두 마리를 사들였다.
어느 날 그가 밭을 갈고 있을 즈음, 그 근방에 유명한 귀족 출신의 란자라는
한 은수자가 그 곁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다른 농부들이 베네딕토를 희롱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꾸짖으며
’이 사람은 훗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유명해 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2, 3일 후에 그 은수자는 다시 밭을 갈고 있는 베네딕토에게 와서
"여기서 그런 일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소 같은 것은 다 팔고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했다.
베네딕토는 마치 옛날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과 같이 즉시 그의 말에 순종했다.
그 은수자에게는 이미 몇 명의 제자가 있었으므로, 교황 율리오 3세는 그의 한 단체를
작은 수도원으로서 인가해 주었다. 사람들은 이 회원들의 성스러운 생활에 감탄하여,
사방에서 교훈을 얻으려 모여들었다.
그러나 회원들은 오히려 그것을 귀찮게 생각하고 오로지 기도와 묵상을 하기 위해
다른 조용한 곳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오래지 않아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베네딕토의 기도에 의해 불치의 종기병 환자가 완치된 후부터는
그 수도원을 찾아오는 이가 더욱 증가했다.
수도자들은 또다시 고요한 곳을 찾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던 중 그 회의 창립자 란자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승천하자
사람들은 베네딕토를 후임 원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1562년까지 원장지기에 있었는데 그해 교황 비오 4세의 명령에 의해
이 수도원은 프란치스코회와 합치게 되어 베네딕토는 평수사로서
팔레르모 수도원에서 지냈다.
그 수도원에서 그는 규칙을 엄수하면서 단식재도 자주 지키는 등
다른 동료들보다 모든 면에서 열심히 모범을 보였으며 게다가 항상 온순하고
겸손하며 명랑했다. 그의 맡은 일은 요리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진실히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며 틈만 있으면 늘 열심히 기도했다.
종종 기도에 몰두하며 부엌일을 잊은때도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천사가 대신
식사 준비를 해 주곤 했다.
어떤 때는 요리할 생선이 없어서 쩔쩔매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베네틱토는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하느님께 도우심을 구하며
물통 몇 개에 물을 부었더니 즉시 펄펄 뛰는 물고기가 넘치도록 그 안에 생겨서
모든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남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적이 몇 번이나 일어났는지 모른다.
하느님께서는 베네딕토의 순진한 마음과 깊은 신앙을 어여삐 보시고
이런 특별한 보수를 내려 주신 것이다.
1578년, 그는 팔레르모 수도원의 원장에 취임하게 되었는데,
이때 수도원내의 수사들이 만장일치로 천거한 것을 보더라도
흑인인 그가 얼마나 순진하고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서 읽거나 쓰는 것조차 모르는 인물이었지만,
학식많은 사제나 유명한 강론가도 기꺼이 그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것은 그의 성덕이 모든 사람들을 승복하게 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설교할 때 성서를 정확히 설명해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청중들은 성령께서 친히 그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는 것같이 생각했다.
9년 후 수련장이 되어서도 그는 자신의 책임을 완수했다.
그는 성 바오로사도의 말씀대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자"(1고린 9, 22 참조)였다.
그는 여행을 하는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큰 곤란을 겪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성인처럼 공경하여 한 번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대대적으로 그를 환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밤에 여행을 해야 했다.
3년간 수련장의 임기를 채운 베네딕토는 겸손하게도 그 후부터는
다시 부엌에 가서 요리를 담당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도움을 간구하는 사람들은 조금도 그칠 줄을 몰랐다.
얼마 뒤 그는 몸이 쇠약해지고, 그러던중에 열이 심해졌다.
그는 자기 임종 날짜를 예언했다.
이미 예언된 날 즉 1589년 4월 3일, 눈물 속에 성체를 모시고 모든이의 용서를 빌고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다음날 고요히 승천했다.
그 날은 마침 성목요일이었다. 지금 그는 팔레르모 시의 주보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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