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성인

3월29일 복녀 요안나 마리아 드 마이유. 3회

김영중 미카엘라 2016. 3. 24. 21:51

3월29일 복녀 요안나 마리아 드 마이유

Bl. JEANNE MARIE de MAILLE,

Beata Giovanna Maria de Maillé, III Order

 

요안나 마리아 드 마이유(Joanna Maria de Maille)의 세례명은

요안나이고 견진성사 때에 마리아란 이름을 받았다.

요안나는 1332년 프랑스 마이유에서 하르두엥 남작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다.

그녀는 기도로써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해주었는데

그 소년이 커서 그녀에게 청혼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젊은 부부는 동정으로 살기로 동의하고 16년동안 오누이처럼 살면서

기도와 선행에 헌신하였다.

1362년 전쟁 포로로 있다가  남편이 죽자

그녀는 남편의 가족들에 의해 성에서 쫓겨났다.

그녀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퍼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집을 잃은 그녀는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쉴 수가 없었다.

친척들이 그녀에게 재혼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피해 그녀는 투르에 있는 작은 집으로 물러가서

그곳에서 다시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그 후 그녀는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어 수덕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플랑슈-드-보의 은둔소에서 지냈다.

그녀는 나병환자들과, 아무도 손대려하지 않는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

뛰어난 효과가 있는 연고를 만드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여인들을 구하고 재활시키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또한 그녀는 죄수들에게 매우 동정심을 느꼈다.

아마 그녀의 남편이 한 때 전쟁 포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은 왕으로부터 투르에 있는 모든 죄수들을 석방하는 허락을 얻어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한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여자라고 불렀다.

3회 수도복을 입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애긍을 청하며 거리를 돌아다닐 때면

나태한 이들과 비판적인 이들로부터 자주 돌팔매질을 당하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이라 여기고 기뻐하였다.

이런 시련 외에도 자기 스스로 가한 엄격함과 긴 단식으로 인한 고통이 보태졌다.

하느님은 그녀를 사랑하셔서 환시와 예언의 은총을 주셨다.

한 때 부유한 남작부인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엄격한 생활에 쇠진하여

1414년 82세의 나이로 투르의 가난한 작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1871년 비오9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