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성인

성 안토니오, 파도바

김영중 미카엘라 2016. 6. 17. 20:05


안토니오는 이태리 북부에서 2년을 보냈고, 그 후에는 프랑스의
몽뻴리에(Montpellier)와 뚤루즈(Toulouse) 대학교들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역시 프랑스의 뿌이(Puy)와 리모쥬(Limoges)에 있는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알비젠시언 이단들(the Albigensians)에 대항하는 토론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그는 "이단을 때려부수는 망치(Hammer of Heretics)"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안토니오의 사명이 설교라는 것이 점점 더 명백하여졌다. 그는 프란치스꼬의 감미로움과 단순함은 없었으며, 시인도 아니었으나, 학식과 달변과 합리적인 분석과 설명,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불타는 열정, 매력적인 인품, 그리고 멀리서도 들리는 우렁찬 음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적인 힘을 발하고 있었으므로, 때로는 죄인들이 단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다. 군중들은 그의 강론을 들으려고 몰려들었으며, 마음이 굳어진 범죄자들, 태만한 신자들, 및 이단들이 회개하고 고해 성사를 보았다. 사람들은 그들의 가게와 사무실 문을 잠그고 안토니오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였으며, 여자들도 성당 안의 자리를 잡으려고 새벽에 일어나거나 아예 성당 안에서 밤을 새우는 이들도 많았다. 성당 안에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을 때에는 광장이나 시장에서 설교하기도 하였다.

1226년 성 프란치스꼬가 세상을 떠나자, 안토니오는 프란치스꼬 회의 장상으로서의 성인의 직책을 물려받기 위하여 다시 이태리로 불리움을 받았다. 그 때 수도회 내에는 프란치스꼬 성인이 세운 규칙과 유훈에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의견 차이들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안토니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해에 안토니오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수도회 안의 모든 직책으로부터 물러나도록 허락받았으며, 그 후에는 오직 강론에만 전념하였다. 교황은 안토니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가 성서의 내용을 특별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성서의 궤(the Ark of the Testament)"라고 불렀다.



그 후에 안토니오는 그가 이미 친숙해져 있던 파두아에 머물렀다. 그는 다른 어느 곳들에서보다 파두아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었으며, 그 도시 안에는 큰 도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오랫 동안 불화하던 사람들이 화해하였으며, 희망이 없던 죄수들이 풀려났고, 부당하게 물건을 취득한 이들은 이를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 안토니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그 당시 널리 행해지고 있던 고리대금업을 비난하였으며, 빚을 갚지 못하는 이들이 그들이 가진 것을 다 내어놓겠다고 한다면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시 정부의 관리들을 설득시켰다. 안토니오가 한 번은 흉포하고 위험한, 황제의 사위, 엑첼리노 3세 공작(Duke Eccelino III) 앞에 대담하게 나아가서 공작이 구금하고 있던 베로나(Verona)의 여러 시민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의 요구는 거절되었으나, 공작은 안토니오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 그의 말을 조용히 들었으며, 그가 폭행을 당하지 않고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하였다.



1231년 봄에 강력한 일련의 강론들을 한 후에 안토니오의 힘이 쇠진하였으며, 그는 두 명의 수사들과 함께 숲속에 있는 피정의 집에서 쉬었다. 그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분명해지자, 그는 파두아로 데려가 달라고 하였다. 그는 파두아의 교외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는 6월 13일에 아르첼라(Arcella)에 있는 클라라 수녀회의 지도 신부가 거처하는 숙소에서 마지막 성사들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겨우 36세였다. 그는 세상을 떠난 지 1년도 못되어 시성되었으며, 파두아의 주민들은 그의 유해를 그들의 가장 귀중한 소유물로 생각해오고 있다. 그들은 1263년에 성인을 기리는 대성전을 건축하였다.


1228년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회 대표 자격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를 알현하였다. 교황궁에서 한 그의 설교는 성경의 보물 창고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강론집 저술을 요청받았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바로 《축일 강론》(Sermones in Festivitates)이다. 그레고리오 9세는 안토니오를 가리켜 ‘신약의 방주’(Doctor Arca testamenti)라고 칭찬하였다

  그의 제대들 앞에서 기도하는 이들이 받은 혜택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그는 "기적을 행하는 성인(Wonder-working Saint)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7세기부터 그는 자주 그의 팔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그가 한 친구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 친구가 안토니오가 거룩하신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황홀스럽게 그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일에 기인한다.

    그는 또한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방대한 성서 지식을 뜻하는 것이며, 때로는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화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노새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성인이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성체 앞에서 노새가 무릎을 꿇음으로써 성체 성사에 주님께서 실제로 계심을 믿지 않았던 그 노새의 주인을 회개시켰던 사건에 기인하는 것이다. 안토니오는 임산부들, 불임증의 여인들, 가난한 이들, 그리고 여행자들의 특별한 보호 성인이다.

   성인의 중개를 구하며 바치는 애긍을 "성 안토니의 빵(St. Antony's Bread)"이라고 부른다. 그는 또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성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한 수련자가 수도원으로부터 안토니오가 사용하던 귀중한 시편집을 가지고 도망갔는데, 성인이 기도를 드리자, 그 수련자가 어떤 놀라운 발현을 보고 겁에 질려서 그 책을 다시 가져왔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