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3일 성녀 쿠네군다 수도자
Bl. Cunegunda, religious, II Order (For II and III Order nuns)
성녀 헝가리의 엘리사벳의 조카
복녀 욜렌타(기념일:6월12일)의 언니인 성녀 쿠네군다는
1224년 헝가리의 왕 벨라의 공주로 태어났다.
크라카우의 영주 볼레스라브 5세와 결혼하였다.
남편이 죽은후 1279년 성 클라라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원장으로 봉사하면서
그 지방의 가난한 이와 환자들의 사정에도 관심을 가져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1292년 선종하였으며 1999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에서)
폰테콜롬보 막달레나 경당에 그려져 있는 성녀 쿠네군다
마걀 이름으로 킹가(Kinga)였던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또는 구네군다)는
헝가리의 국왕 벨라 4세의 딸이자 성녀 엘리사벳의 조카였다.
쿠네군다는 궁중에서 ‘라틴어와 하느님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면서 자랐고
16세 때 폴란드 국왕 볼레슬라우스(Boleslaus)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비록 결혼에는 동의하였으나 결혼한 밤에 왕에게 정절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1년 동안만 지키자고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이 다 끝나기 전에 왕과 왕비는
크라쿠프(Krakow)의 주교 앞에서 평생 동정을 서약하였던 것이다.
왕비는 궁중의상 아래에 허름한 옷을 입고 엄격한 생활을 하였고,
수시로 병자와 가난한 이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1279년에 남편이 서거하자 그녀는 나라를 다스리라는 귀족들의 청을 물리치고, 자신이 스타리 사치(Stary Sacz)에 세운 클라라 봉쇄 수녀원에 들어가서 여생을 지내다가 1292년 7월 24일 선종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성당과 병원을 지었으며, 작은 형제회를 위해 많은 경비를 지출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그녀 주위에 수많은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서 그녀의 출중한 덕행이 더욱 빛났다고 한다. 성녀 쿠네군다에 대한 공경은 이미 169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허락되었고,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는 그녀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1998년 7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녀를 복자품에 올렸고, 이듬해인 1999년 6월 16일 폴란드를 방문하여 스타리 사치에서 그녀에 대한 시성식을 집전하였다.
(가톨릭홈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성녀 구네군다(Cunegunda, 1224-1292)는 가난한 클라라 수도원(Poor Clara convent)을 세웠으며, 일명 킨가(Kinga)라고 불린다. 구네군다는 헝가리의 임금 벨러 4세(Bela IV)의 딸이고 헝가리의 성녀 엘리자베스의 조카딸로서 16세가 되었을 때, 폴란드의 임금 볼레슬라우스 5세(Boleslaus V)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남편인 볼레슬라우스 5세에게 동정으로 살고 싶다는 자신의 소원을 말하였다. 볼레슬라우스 5세는 아내의 간절한 소원을 물리치기 어려워 1년간만 서로 동정을 지키면서 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다가 구네군다와 볼레슬라우스 5세는 동정 서약을 평생 지키기로 다짐하였고 마침내 크라쿠프(Krakow)의 주교 비알라체프(Bialaczew)의 프란도타(Prandota) 앞에서 평생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서약하였다. 이 서약을 한 이후로 볼레슬라우스 5세는 ‘동정인’(童貞人)으로 불렸다. 그들 부부는 비록 궁정에서 왕과 왕비로 살았지만, 검소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선사업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데에 자신들의 시간과 왕실의 재산을 기꺼이 바쳤다. 당시 폴란드 왕가의 일대기를 기록한 전기들을 살펴보면, 폴란드 백성은 왕비 구네군다를 ‘위로자’, ‘의사’, ‘거룩한 어머니’ 그리고 ‘유모’(乳母)라고 불렀다.
구네군다는 문학을 통하여 폴란드의 문화진흥 정책을 펄쳐나갔다. 그리하여 다윗의 시편을 폴란드어로 번역한 졸타르즈 다비두프(Zoltarz Dawidow)를 편찬하였다. 구네군다는 크라쿠프의 주교와 함께 크라쿠프의 주교로 순교하였던 슈체파누프(Szczepanow)의 스타니슬라우스(Stanislaus)의 시성을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였다. 구네군다의 영성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구네군다와 동시대를 살았던 성녀 히야친타였다.
1279년, 남편인 볼레슬라우스 5세가 서거하자 구네군다는 자신이 세운 스타리 사치(Stary Sacz)의 봉쇄 수도원인 클라라 수녀원으로 들어가 수녀가 되었다. 수녀원에 들어갔지만 구네군다는 여전히 많은 곳에 성당과 병원을 지었고 터키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그리스도인들의 몸값을 지불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데에 헌신하였다. 1287년, 몽골 타타르군이 폴란드를 침범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폴란드 군대가 패주하자 구네군다는 수녀원에 함께 있던 수녀들을 이끌고 한 성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몽골 타타르군은 자신들이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요새를 처참할 정도로 파괴하고 인근의 마을들을 초토화하여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에 구네군다와 수녀들이 피신한 성도 그러한 비극에서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구네군다는 전적으로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열심히 기도하여 그 성에 피신한 수녀들은 물론이고 그 성과 주변 지역에 거주하던 모든 백성을 구하였다.
구네군다는 놀라운 기도의 힘과 거룩한 성덕으로 죽기 전부터 사람들에게 성녀로서 추앙을 받았다. 교회가 구네군다에 대한 공경을 정식으로 허락한 것은 1690년이었고, 1715년 그녀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1999년 6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구네군다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녀 킨가는 그리스도와 일치한 삶을 살아갈 때 결혼과 동정 모두가 성덕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성녀 킨가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결혼생활과 동정생활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주고 보호하여 줍니다. 성녀 킨가는 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합하여 부부가 되는 불가해소적인 성사이므로 이는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 놓이게 되든 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결혼생활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서로를 부부로 맺어준 근본적인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들의 결혼생활을 늘 지켜주시고 축복하여 주시기 때문에 어려움이 찾아온다 하여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결혼생활이 때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형극의 길이 될 때도 있지만, 결혼생활을 통하여 부부는 성덕에 이르게 됩니다. 성녀 킨가는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봉쇄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이 수도원의 벽들은 오늘날에도 성녀 킨가가 얼마나 동정생활과 정결의 덕을 높이 기렸는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녀 킨가는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지켜주시는 동정생활이 얼마나 큰 자유로움을 주는지 정확히 보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이 내적 자유를 그리스도와 성덕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교회와 역사, 2012년 5월호, 번역 송영웅 바오로(봉명학원 재단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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